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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팔정도(비구 보디 지음, 전병재 옮김, 고요한 소리 출판사)를 읽고 대충 작성한 내용입니다.**



'정리O'카테고리에 분류되지 않은 글들은 모두 글 구성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서, 이 글만 처음 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개념 등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활용하거나 동일한 주제로 쓰여진 이전 글들을 찾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오늘은 오전에 2시간을 투자해서 책을 읽었는데 진도가 1장 나갔다;; 아무튼 그 범위 내에서 간략하게라도 글을 쓰고자 한다.


내가 오늘 읽은 범위에서 핵심적인 키워드 중 하나는 "통찰 경험"이다.


즉 이런 통찰 경험을 한 번만이라도 겪게 되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습관적으로 열중해왔던 일들도 하찮게 여기며, 지금껏 즐겁기만 했던 일들이 불만스러워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된다.


위의 인용문만 봤을 때는 '이런 통찰 경험'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책의 맥락을 제외하더라도, 키워드에 대해 드는 일차적인 생각,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그냥 통찰이라고 하면, 그것은 '통찰하다'라는 행위의 명사화에 불과하나, '경험'이라는 단어와 결합하면 꽤나 묘한 느낌을 낳는다. 보통 어떤 대상을 통찰하는 것은 '통찰한 내용'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다. 만약 특정 사회 현상들을 관찰하고 사유하여 정의(正義)라는 추상적 개념을 통찰했다면, 많은 경우에 관심을 받는 것은 그의 통찰 속에서 발견되는 정의를 정의(定義)한 방식, 정의의 근거, 혹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통찰한 것과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통찰 경험이라는 표현은 그가 통찰한 객관적 내용보다는 '그'라는 주체에 좀 더 초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통찰 경험'을 두고 나오는 서술은 아마도 통찰한 주체가 그 행위의 결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따위가 될 것이다.



내가 왜 통찰이 아닌 '통찰 경험'에 더 강한 감정을 가졌는지 아래의 추가적인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지금의 사회가 주체의 경험보다는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대상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특정한 수학적 개념을 두고 생기는 수학적 증명과 이를 표현하는 수식들, 혹은 참-거짓 등의 판단은 비록 추상적일지라도 마치 손에 잡히는 사물처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교육을 통해 전달되기 쉬운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교육을 통해서조차 전달하기 어려운 내적 현상과 요소들이 수학 개념을 접하고 공부할 때 동시에 일어난다. 그것들은 분명히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공동의 것으로 만들기 어려운 것들은 쓸모가 없으므로 이를 최대한 묻어놓고 객관적 산출물을 만들어낼 것을 주로 요구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삶의 질과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객관적 산출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하는 주관적인 느낌, 감정, 혹은 희미한 생각들이다. 또한 주관적이고 공유하기 어려운 그 요소들은 거꾸로 사회가 요구하는 '객관적 산출물'의 질에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컨대 아무리 고도의 인내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수학을 보고 아무런 주관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갖지 않는다면 어떠한 수학적 개념을 배울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공동의 것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롭고 가치있는 것이지만, 객관에만 치중한 나머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결코 삶의 질은 향상될 수가 없다. 사회가 공동의 산물을 주로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개인들은 그저 자신을 위해서 주관에 투자할 필요도 있다.